이것만 쓰네/이기철
2024. 9. 9. 15:43ㆍ시 읽고 쓰는 기쁨
☞ 태양을 바라다 바라다 까맣게 엉글어 가는 해바라기꽃

이것만 쓰네 / 이 기 철
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
山房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
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
단풍잎 다 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
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풀숲 속으로 이사를 간 엉겅퀴
꽃씨를
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
사월 달래순이 묵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힘을 본 것도 같은데
저를 좀 옮겨달라고 내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, 어언 한 해를 다 살아버린
풀씨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은데
아직도 흙 이불로 돌아가지 못한 고욤 열매의 추위를 느낀 것도 같은데
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
《출처; 우리가 보낸 순간 -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· 시 /김연수/마음산책,2021》
'시 읽고 쓰는 기쁨' 카테고리의 다른 글
| 해바라기 비명碑銘/함형수 (3) | 2024.09.21 |
|---|---|
| 어디로?/최하림 (0) | 2024.09.20 |
| 연(蓮)/조 명 (0) | 2024.08.02 |
| 送人(송인) ㅡ 정지상 (0) | 2024.07.01 |
| 꽃/김춘수 (5) | 2024.05.27 |